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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서원)익산 미륵산 화산서원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

와이투케이 2020. 5. 20. 23:49

 

 

 

익산화산서원

조선 시대 중등교육기관

 

 

 

 

고대국가 백제 말기의 왕도이었던 익산은 다른 도시에 비교해

문화재가 많이 있고 많이 남아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백제 역사지구에 등재된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지

그리고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석탑과 국보 제289호 왕궁리 오층석탑이

익산의 대표적인 문화재이지요.

익산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문화재들 말고도 소소한 문화재들도 많이 있습니다.

문화재들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여 후대에 물려주는 것 역시

우리 세대의 의무이자 책무입니다.

 

 

 

 

서당, 서원과 향교 그리고 성균관 등 조선 시대 교육기관들 역시 문화재이고

이들 역시 잘 보존 관리하여야 합니다.

이 교육기관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서당은 초등교육기관이고,

향교는 지방의 국공립 중등교육기관, 서원은 사립 중등교육기관,

성균관은 국립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조선 시대 교육기관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도 재미가 쏠쏠합니다.

 

 

 

 

서당과 향교, 성균관 등도 서원처럼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원은 통상 봄, 가을 일 년에 두 번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원에서는 선현(우리나라의 유명한 유학자)을 모시고

향교에서는 옛 성현(공자, 맹자 등과 선현)을 모시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익산 금마 미륵산에 있는 화산서원이 때마침 춘기 대제(제사)를 지낸다 하여

사전에 서원의 원장님과 관리 관계자의 협조를 구한 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익산 금마 화산서원

 

 

 

 

익산 미륵산에 있는 화산서원은 1657(효종 8)에 창건되었으며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이었으며 송시열의 스승이었던

사계((沙溪) 김장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입니다.

창건 5년 후 1662(현종 3)에 사액 서원이 되었으며,

1695(숙종 21)에 우암 송시열을 추가 배양하였습니다.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6.25로 소실되었다가

1968년에 익산 팔봉의 유림들이 주축이 되어 중건하면서

소두산, 소휘명, 황자후 등 3인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있습니다.

 

 

 

 

익산에는 화산서원 외에 화암서원, 오강서원, 동산서원 등이 있으며

다른 도시에 비교하여 서원이 많지 않습니다.

이들 서원 중 가장 규모가 큰 서원이 화산서원과 화암서원이며,

화산서원은 신 서원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화암서원은 화산서원보다 더 오래전에 설립이 되어 구 서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화산서원은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와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를 품고 있는 익산

미륵산에 있지만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미륵산의 전북과학고등학교와 전북교육연수원과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산기슭에 꼭꼭 숨겨져 있는듯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서원인데요.

대로변에 화산서원이라는 간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위패가 있는 본원의 화산서원이란 현판은 전 서원 원장이자 동인당 한의원 원장인

유학 소병창의 글씨이며, 서원으로 들어가는 정문의 화산서원의 현판은

후학 황상규의 글씨이고요.

서원 격치제(格治齊)의 현판은 진사 소학규의 글씨로 되어있었습니다.

소실된 서원을 중건하면서 현판을 다시 설치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서원으로 들어가면 양쪽 담 구석에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잘 자라고 있어 서원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는데요.

조선 시대 문인들의 정자나 서원에는 주로 배롱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고,

배롱나무의 크기와 굵기를 보아

서원이 처음으로 지어지었을 때 심은 나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화산서원 앞으론 미륵산 둘레길인 무왕 길이 조성되어있습니다.

백제 30대 왕의 왕릉인 쌍릉을 출발하여 무왕과 선화공주가 건립한 미륵사지를 거처

이곳 화산서원을 거처 대나무 숲길 화살표를 따라가면

구룡마을의 대나무 숲길과 만나게 되고요

백제 왕궁인 왕궁리 유적지까지 이어져 있어

백제의 역사와 무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아름다운 들레길입니다.

 

 

 

 

춘기대제(春期大祭와 제관분방기(祭官分榜記)

 

 

 

 

춘계제사는 지난 515() 11:00에 화산서원 본전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화산서원의 김형배 원장님으로부터 서원과 제사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요.

필자처럼 일반인들은 잘 이해하기가 어렵고 제사의 전문용어들이라서 많이 복잡하였습니다.

 

 

 

 

춘기 대제(봄 제사)는 선현의 예의 도덕 사상을 재조명하고,

질서와 봉사 정신 함양을 위한 제사 의식입니다.

이날 제사는 화산서원이 위패로 모시고 있는

김장생, 송시열, 소두산, 소휘명, 황자후 등 5분의 제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화산서원 보존회 회원 20여 명이 서원에 모여 제복으로 갈아입고

경건한 마음과 자세로 제사를 지내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는데요.

제사는 제관분방기에 따라 제일 먼저 위폐의 문을 여는 의식이 진행되고요.

미리 준비한 제사음식을 다섯 분의 위패 앞에 차려 놓고

제주인 초헌관이 축문 낭독을 한 후

두 번째와 세 번째 헌 주자인 아헌관 중헌관 등등

제사에 참여한 회원들이 순서에 따라 차례로 5분의 위패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데요.

모든 제사의 과정은 진행자인 집례가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제주(祭主)인 초헌관을 따르는 자는 사준 이라고 하고, 제물 잔을 올리는 자는 전작,

제물 잔을 내리는 자는 봉작이라고 하는 등등 제사 용어들이 처음 들어본 말들이 대부분이라 팔자도 이번 제사 참여로 공부를 많이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은 서원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놓고

위패를 모시고 있는 본원을 중심으로 한 가운데는 신() 다니는 길이라고 하여

비워놓아야 하고 진행 과장을 카메라에 담는 필자도

이를 항상 신경을 쓰며 조심해야 했습니다.

 

 

 

 

서원 보존회 회원이 되려면 일단 유학을 신봉하는 선비 또는 양반들의 단체인

유림의 회원이어야 하며 보존회 회원이 되면 제사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익산 유림의 회원은 향교의 유림을 포함 약 200여 명 정도라 합니다.

 

 

 

 

대부분 서원들이 그러하듯 미륵산의 화산서원도 항상 문이 닫혀 있어

위패 등 내부시설들이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서원 역시 문화재이기에 관리하기가 쉽지가 않고 화재, 도난 등의 우려 때문에

문을 닫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원은 평소에는 누구든 서원을 구경할 수가 없으며,

사전에 관리인에게 협조를 구해야 서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화산서원 주차장 아래에 있는 외딴집이 서원 관리인의 집입니다.

 

 

 

 

조선 시대 서원이란?

 

 

 

 

서원은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우고 선현들에 대한 제사(교육과 선현 봉사)를 지내는

두 가지 기능이 대표적입니다.

조선 시대 서원은 16세기 이후 사림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사학으로서 서원을 설립하여 교육을 담당하게 되고

향교는 점차 교육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지요.

서원은 지방의 사람 출신들이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 세웠다 할 수 있습니다.

주세붕의 백운서원이 시초이며 후에 이황의 건의로 사액 서원이 되어

세금면제 등 혜택을 받아 서원철폐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전국에는 650개의 서원이 있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소수서원, 도산서원, 도동서원 등 사표가 될 만한 47개의 서원만 남겨지고

모두 철폐하였습니다.

 

 

 

 

서원과 향교에서 제사를 지내는데요.

향교에서는 옛 성현(공자, 맹자 등과 선현)을 모시고,

서원에서는 선현(우리나라의 유명한 유학자)을 모시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서원이라고 하면 사액이란 말이 자주 나오는데요.

그럼 이 사액은 무슨 말일까요?

바로 조선 시대 왕으로부터 편액,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는 사원으로 우리나라 최초 사액 서원은 백운동서원으로,

소수서원이란 현판과 서적을 하사받고

서원 소속의 토지 및 노비에 대한 면세, 면역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답니다.

 

 

 

 

 

김장생(金長生)과 송시열(宋時烈)

 

 

 

 

김장생(1548~1631)은 중선 중기의 학자·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사계(沙溪)입니다.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송시열의 스승으로 송익필과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예학에 정통하여 우리나라 예학의 토대를 확립하였습니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 경력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로서 영향력이 매우 컸고요.

고향인 연산에서 주로 학문과 교육으로 많은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송시열·송준길·이유태 등 당대의 명사가 즐비하게 배출되었습니다.

 

 

 

 

1688(숙종 14)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익산 미륵산의 화산서원 외에도

연산 돈암서원, 공주 충현서원, 안성 도기서원 등등 10여 곳의 서원에 제향 되어있습니다.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우암(尤庵)입니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이 사사(師事)를 주었는데요.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고요.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 낙향하여 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습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 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등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 소에 이릅니다.

사액(賜額) 서원이 무려 37개소나 된다 합니다.

 

 

 

 

 

 

미륵산의 화산서원 등 모든 익산의 서원들이 조선 시대 중등교육기관으로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또한 잘 보전 관리되어

오래도록 시민들의 참된 교육의 장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