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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를 완주하자)동학혁명의 역사가 숨 쉬는 곳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와이투케이 2020. 12. 31. 18:42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동학혁명의 역사가 숨 쉬는 곳

 

 

동학농민혁명(갑오농민전쟁)은 농부들과 동학도들이 오직 애국 단심과 구국의 일념으로

잘못된 사회를 바로 잡으려 일으킨 저항 운동입니다.

 

 

완주군은 특히 삼례 봉기를 비롯해 대둔산 최후 항쟁지까지 동학농민혁명군의 숭고한 정신과 넋이 살아 숨 쉬는 역사의 고장입니다.

18952월 대둔산에서 고산지역농민군이 최후까지 항쟁했고, 대둔산 최후 항쟁터는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보존된 동학농민군 전쟁 유적지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삼례 봉기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큰데요.

삼례 봉기는 전북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이 전주성 입성 후 해산하였다가

.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자 국권 수호를 위해 농민들이

삼례에서 봉기하여 반일항전에 나섬으로 전국적인 구국 항쟁의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깃들어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제2차 동학농민군 봉기의

발원지였던 삼례 봉기의 역사적 의의를 살리고, 동학혁명을 성역화하기 위해 완주군

삼례읍 신금리에 총 1600여평의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이 조성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현장은 군민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인데요.

꼭 한번 자녀들과 다녀가기를 강추 하고 싶은 곳입니다.

주변에 삼례 군립도서관과 완주향토예술회관 그리고 신금 공원이 있어 하루 가족 소풍지로

적당한 곳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삼례 봉기 126주년을 맞아 삼례읍 신금동에 있는 역사적인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이하 삼례봉기역사광장)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산 교육장

 

 

삼례봉기역사광장은 농민혁명의 뜻을 기리기 위한 선양의 장과 농민군의 봉기 모습을

형상화한 대동의 장그리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추념의 장등으로 되어 있는데요.

각각의 주제에 딱 어울리는 상징물을 세워놓았습니다.

삼례봉기 역사광장 입구엔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현장 이라는 큼직한 공원 표지석이

방문객을 반겨주고 있습니다.

 

 

입구엔 누리 널리 하나 되어라는 주제로 만인 농민군 상인 선양의 장이 마천석으로

만들어져있는데요.

삼례 봉기의 수 많은 농민군의 봉기 모습을 앞뒤에 정교하게 새겨 놓았습니다.

 

 

삼례봉기 역사광장 진입로에는 동학농민혁명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오석으로 만들어진

표지석 5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고요.

표지석들에 새겨 있는 설명문 내용을 자세히 보니 바로 동학농민혁명을 공부할 수 있는

역사교육 현장이었습니다.

동학혁명의 성격과 제1차 기병을 시작으로 삼례 뜰에 집결하는 농민군, 삼례 뜰의 입지조건, 삼례 제2차 기병, 삼례 뜰에 집결하는 농민군, 타오르는 항쟁의 횃불, 북상하는 농민군까지

차례로 자세하게 앞뒤로 설명되어있습니다.

 

 

설명뿐 아니라 표지석 측면에는 이를 그림으로도 정교하게 새겨 놓았습니다.

 

 

이곳 삼례봉기 역사광장에서는 매년 가을이며 완주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사진출처:완주군청)

 

 

동학농민혁명의 상징적인 조형물

 

 

광장 왼쪽을 보면 커다란 글씨의 위엄있는 동학농민혁명봉기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이 동학농민혁명 공원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데요.

봉기비 밑의 받침석에는 일필휘지의 척왜양창의 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옵니다.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는 동학 교도들이 보은집회에서 처음으로 부르짖었던 구호로서

일본과 서양세력을 배척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동학혁명봉기비 양 옆에는 전봉준 재판기록 내용과 전봉준 대장이 충청감사 박재순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을 세긴 비문도 볼 수 있습니다.

 

 

광장 왼쪽 대나무밭 옆에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커다란 농기구인 쇠스랑을 우람한 팔로

들고 있는 조형물이 있는데요.

청동 주조로 만든 대동의 장은 민족봉기를 상징하는 농기구 쇠스랑을 형상화했고요.

농민군을 형상을 조각한 높이 9m, 탑신둘레 3m 규모의 기념탑과 기념비로 되어 있습니다.

 

 

광장 앞 정중앙에는 돔 형태의 웅장한 조형물이 있는데요.

청동 화강석을 소재로 만든 조형물로 돔 형태로 제작된 추념의 장입니다.

각종 행사 때 추모행사를 하는 곳입니다.

 

 

이들 기념 조형물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정신을 잘 표현하고 상징적 조형미의 우수성과

역사교육성, 창의성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조형물 현상 공모전에 응모한 작품 중에서

우수작품으로 선정된 작품을 동학농민혁명 삼례 2차 봉기를 성역화 하기 위해

만들어놓았다 합니다.

 

 

동학농민 4대명의(四大名義) 표지석도 세워져 있습니다.

전봉준을 총 대장으로 삼은 10만여 동학 농민군은 1984년에 농민군들의 행동강령인

4대명의와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고 백성의 궐기를 호소하였는데요.

그 내용은

1. 사람을 죽이거나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3.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깨끗이 한다.

4.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 입니다.

 

 

방문은 곧 동학농민혁명을 공부하는 계기

 

 

동학농민군은 왜 죽창을 들고 총을 든 일본군과 싸워야 했나요?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의 인구가 1,050만 명 정도이었다고 하는데요.

그중에 200-300만 명이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전 인구의 1/3이 국권 수호를 위한 구국 항쟁인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을 한 바퀴 돌며 다양한 조형물과 비문에 새긴 글들을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텔레비젼을 통해 한편의 동학혁명의 드라마를 보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무심코 소흘했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현장은 학생들 아니 전 국민의 산 교육현장입니다.

전국적인 반일 구국 항쟁으로 확산된 계기가 된 동학농민혁명 삼례 봉기의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함으로 완주군민들의 자긍심도 높이는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현장이 선조들의 애국·애족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는

나라 사랑의 산 체험장이 되길 바랍니다.

코로나19를 잘 극복하고 모든 사람이 한 번씩 다녀가는 역사의 현장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