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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한씨(淸州韓氏)와 익산쌍릉(雙陵)의 관계

와이투케이 2014. 1. 1. 15:26

 

 

‘위략(魏略)’과 ‘위지(魏志)’, ‘기자외사(箕子外史)’ 등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을묘년(기원 전 1122년)에 주(周)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토멸하니 기자(箕子)는 홍범(洪範)을 전하여 주고 동으로 조선(朝鮮)에 들어갔음으로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후(朝鮮侯)로 봉하였다. 그러나 기자(箕子)는 신하로서 무왕(武王)을 섬기지 않았으며, 기자(箕子) 후 40여 세(世)에 이르러 준왕(準王ㆍ武康王 혹은 哀王)이 연(燕)나라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좌우궁인(左右宮人)만을 인솔하고 바다에 떠서 남으로 금마군(金馬郡ㆍ지금의 전북 익산)에 와서 마한(馬韓)을 건국하였다. 마한(馬韓)은 9대 계왕(稽王)에 이르러 백제(百濟)에게 멸망되고, 원산(員山)과 금현(錦峴) 두 성만 보존하고 있다가 신망기사(新莽己巳)에 두 성도 백제에게 투항하였다.



마한(馬韓)의 8대 원왕(元王)에게는 세 아들이 있어 우평(友平)ㆍ우량(友諒)ㆍ우성(友誠)으로, 나라가 망하자 우평(友平)은 고구려(高句麗)에 가서 유리왕(琉璃王)조에 사사(仕事)하면서 북원 선우씨(北元鮮于氏)가 되었고, 우성(友誠)은 백제(百濟)로 가서 온조왕(溫祚王)조에 사사(仕事)하면서 행주 기씨(幸州奇氏)가 되었고, 우량(友諒)은 신라(新羅)에 가서 탈해왕(脫解王)조에 사사(仕事)하면서 상당 한씨(上黨韓氏) 즉 청주 한씨(淸州韓氏)가 되었다.

기자(箕子)를 시조로 우량(友諒)의 32세손인 란(蘭)을 중시조로 하는 청주 한씨(淸州韓氏) 가문에서는 전북 익산시 석왕동 산 55번지와 56번지에 위치한 익산 쌍릉(益山雙陵ㆍ사적 제87호)을 연(燕)나라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좌우궁인(左右宮人)만을 인솔하고 남쪽 금마군(金馬郡)에 와서 마한(馬韓)을 건국한 준왕(準王ㆍ武康王)의 무덤이라고 주장해 왔다.

익산 쌍릉(益山雙陵)은 남북으로 2개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쌍릉(雙陵)이라고 부르는데, 북쪽의 것은 대왕묘, 남쪽의 것은 소왕묘라고 부른다. 이 쌍릉과 청주 한씨(淸州韓氏) 가문과의 관계는 해방후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청주 한씨 가문의 한 유력자가 1958년 당시 국유지에 속했던 익산 쌍릉((益山雙陵)을 불하받으면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쌍릉(雙陵) 일대 약 5만여 평의 국유지를 불하받아 능에 석물을 세우고 매년 한식(寒食)을 기해 제를 지내는 등 자신들의 조상임을 공공연히 밝혀 왔다.

 익산 쌍릉(益山雙陵)은 고려 제27대 충숙왕(忠肅王ㆍ1294~1339) 때 도굴된 기록이 있고, 1917년에 학술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시 구조는 부여 능산리(陵山里)에 있는 백제 왕릉과 동일 형식에 속하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밝혀졌다.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당시의 돌방 안에서 비교적
완전한 나무널[木棺]이 출토되어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학자들은 쌍릉(雙陵)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목관이 부여에 있는 무령왕릉(武寧王陵)의 목관과 같은 재질로 일본에서 들여온 목재라는 사실을 밝혀 냈고, 묘제도 청주 한씨(淸州韓氏)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준왕(準王ㆍ武康王) 시기인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묘제가 아니라 이보다 800년 가량이나 늦은 백제의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입증했다.

이같은 역사적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현재는 청주 한씨(淸州韓氏) 내부에서도 쌍릉(雙陵)이 정말로 자신들의 시조묘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지난 2000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익산쌍릉과 백제고분의 제문제’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 쌍릉(雙陵)이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武王)과 그의 왕비인 선화비(善花妃)의 무덤인 것으로 사실상 결론이 맺어지면서 청주 한씨(淸州韓氏)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백제 무왕릉(익산쌍릉) 이야기 바로가기☞http://blog.daum.net/y2k2041/15811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