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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고찰의 문화재를 찾아서 익산의 혜봉원(慧峰院)

와이투케이 2021. 3. 24. 21:54

 

도심 속 고찰의 문화재를 찾아서

익산의 혜봉원(慧峰院)

 

 

봄을 상징하는 벚꽃이 활짝 피는 등 온갖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오르는 완연한 봄날입니다.

코로나 19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상이 계속되고 외출이나 여행하기가 쉽지 않은

요즘인데요.

누구나 여행이나 답사에서 꼭 들리는 곳 중 한 곳이 사찰이고요.

우리나라 문화를 이해하는 데는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불교와 사찰은 필수적인 주제입니다.

 

 

산사라는 말에서 보듯, 사찰은 산속에 있는 절로만 생각이 되는데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찰이 들어서야 하는 곳을 마을과 멀거나 가깝지 않은 곳이라

했다 하는데요.

처음부터 산속에 사찰이 있던 것은 아니고, 왕궁이나 도성에서 가까워야 참배하기 쉽기에

옛날엔 대부분 산속이 아닌 도성 가까이에 사찰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참선 수행에는 산이 좋다 하여 산속 사찰이 계속 창건되었다 합니다.

 

 

여러분! 절 이름이 원()으로 끝나는 사찰을 보았는가요? 또는 들어보았는가요?

사찰이라고 함은 미륵사와 사자암처럼 대부분 사찰이 사() 또는 암()으로

불리고 있는데요.

익산시 도심 한복판에 사찰 이름이 원으로 되어있는 사찰이 있습니다.

작은 사찰이 아니고 도심 속 사찰로는 익산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오래된 고찰인데요.

바로 모현동에 있는 혜봉원입니다.

 

 

혜봉원은 익산역에서 오산과 임피로 가는 옛길인 () 도로 끄트머리의 모현동에 있는데요.

문화재도 3점이나 보유하고 있으며, 많은 문화적 가치를 지닌 불교 유물들이 있어.

필자가 조심스럽게 마스크 끼고 혜봉원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혜봉원 일주문에 해당하는 정문에는 이해인 시인의 봄이 오는 길목에서라는 시구가 걸려있어 봄이 어느새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입구의 벚꽃도 어느새 만개하여 사찰을 오가는 방문객들을 반겨주고 있습니다.

 

 

해봉 스님과 초지 스님의 발자취

 

 

익산 혜봉원은 대한불교 화엄종 종단의 사찰인데요.

범어사. 해인사. 화엄사. 불국사. 부석사 등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사찰들이 바로 대한불교 화엄종 종단의 사찰들입니다.

 

 

익산 혜봉원은 조선 인조 때의 승려 연화당을 추모하기 위해 고종 31(1894) 제자들이

삼곤사 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인데요.

이후 운영이 어려워진 이 사찰을 금산사의 주지이었으며 혜봉원의 초대 주지 스님이었던

하규호 혜봉 스님이 1955년에 인수하여 절을 중창(重創)하고, 자신의 법명을 따서

혜봉정사(慧峰精舍)라고 했으며, 이후 1956년에 혜봉원(慧峰院)이라 이름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혜봉원의 주지 스님은 초지 스님인데요.

36년 전 초대 주지 스님이 입적하신 후, 혜봉 스님의 딸인 초지 스님(76)이 이어받아 주지 스님으로 있습니다.

 

 

혜봉원의 문화재와 유적

 

 

사찰 내에는 대웅전인 불이정사(不二精舍) 법당과 소법당. 요사채. 우화루. 해탈문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혜봉원 목조석가여래삼존상. 혜봉원 목조보살입상. 모현동 부도. 오층석탑. 부도밭에 혜봉원 사적비 등이 있습니다.

 

 

혜봉원의 문화재로는 2001921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0호로 지정된

혜봉원 목조석가여래삼존상(석가여래좌상. 보현보살좌상. 문수보살좌상)20021214일 익산시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된 혜봉원 목조보살입상이 대웅전인 불이정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경내 부도밭에는 198441일 전라북도 지방문화재 자료 제13호로 지정된

모현동 부도가 있습니다.

본존인 석가여래좌상과 좌측의 보현보살좌상은 1712(숙종 38)에 제작되었으며 우측의

문수보살좌상은 도난을 당해 최근에 다시 제작된 작품으로 문화재에서 제외되어있습니다.

 

 

대웅전 좌측 불단 위에 봉안된 혜봉원 목조보살입상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연꽃을 받들고 서 있으며 조각승 원오(元悟)가 제작하였다고 하고요.

 

 

모현동 부도는 조선 인조 때 승려 연화당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건립하였으며,

연화당 부도라고 부르고 있으며, 높은 기단 위에 공 모양의 탑신을 올린 후 8각의 옥개석과 불탑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로 된 원기둥 모양의 장식 부분인 상륜을 갖추고 있는 부도입니다.

 

 

우화루와 해탈문의 편액 글씨가 보통 글씨가 아닌데요.

자세히 보니 익산이 낳은 한문 서예가의 대가이자 소전 손재형 선생 고제이며 익산과

군산 교육장을 지냈으며, 산처럼 물처럼 살다간 익산이 낳은 한문 서예가의 대가인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 1924~2008) 선생이 1976년에 쓴 친필이었습니다.

국전 초대작가이자 국전 심사위원을 지냈던 선생은 한국서예연구회장을 지냈으며 함라산

숭림사 등 다수의 편액을 많이 남기었습니다.

 

 

혜봉원 초지 스님과 관리자와 인터뷰

 

 

때마침 혜봉원의 현재 주지 스님인 초지 스님과 해봉 스님의 큰아들이며 초지 스님의 오빠인 하태혁(80) 관리자님과 그의 따님을 사찰 경내에서 뵐 수 있어 혜봉원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Q. 안녕하세요?

초지 스님께서 어떻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주지 스님이 되었나요?

 

A. . 그 당시 저는 원광대학교에 근무 중이었으며, 초지 스님이 불교 대학에서 정식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순천 조계산 선암사에서 수도하여 주지를 맡게 되었습니다.

 

 

Q. 여느 다른 사찰들의 대웅전을 혜봉원에서는 왜 불이정사(不二精舍)로 명명했는가요?

 

A. 불이(不二)란 뜻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세속과 부처의 세계가 둘이 아니며, 선악, 유무, 깨끗함과 더러움, 등등 상대적 개념에 대한 모든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이잖아요?

그래서 불이정사라고 했습니다.

 

 

Q.일주문이라 할 수 있는 정문을 지나 혜봉원에 들어서면 규모가 큰 2층 건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요.

이 건물의 우화루와 해탈문은 어떤 의미인가요?

 

A. 맞아요. 일주문과 법당 사이 두 번째 문이 천왕문인데요.

우화루가 혜봉원의 천왕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부처의 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사천왕을 모시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찰의 천왕문과 같습니다.

해탈문은 대웅전 앞에 있는 비밀의 문이라는 절의 3번째 문을 의미하는데요.

그러니 두 번째 문과 세 번째 문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Q. 봄이라서 동백꽃도 피고 어느새 벚꽃도 활짝 피었으며 여기저기 봄꽃들이 피고 있는데요.

예전의 혜봉원 모습은 어떠했나요?

 

A. 예전에도 운치가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었어요.

우화루에서 불이정사로 넘어오는 다리가 있었는데 돌로 만든 작고 아름다운

구름다리이었습니다.

불이정사로 오려면 이 구름다리를 건너야 했는데요.

매년 33일과 99일에 미륵 대제를 지내는데, 이 구름다리 때문에 불상이 가려지어

아쉽게도 구름다리를 허물었습니다.

지금의 사찰과는 다른 모습이었지요.

예전엔 대웅전에 해당하는 불이정사와 종각만 있었고, 소법당과 요사채 등 불이정사 옆과

앞 건물들은 그 이후 지어진 건물들입니다.

 

 

Q. 종각이라뇨? 종각은 여기에 별도로 있잖아요?

 

A. 예전엔 범종이 우화루에 있었기에 종각이라고 불리곤 했으며 지금의 종각은 그 후에

현재의 위치에 세워지었습니다.

 

 

Q. 도심에 있는 사찰치곤 혜봉원의 규모가 무척 큰데요.

사찰의 규모는 얼마나 되며 예전에 신도들도 많았겠어요? 지금은요?

 

A. 혜봉원의 전체 면적은 약 1,500여 평정도이고요.

익산은 물론이고, 서울과 부산. 전주. 군산. 여수 등 멀리서 오는 신도들도 많았고요.

우화루 2층에 있는, 불기 3003년 병진년에 만든 우화루 건립 시주록과 불이정사

건창 시주록을 보면 혜봉원의 규모와 신도들이 얼마나 많았나를 알 수 있습니다.

 

혜봉원 행사가 있을 때는 경내에서 서로 어깨가 부디 칠 정도로 신도들이 많은 사찰이었으며, 사월초파일이면 연등을 매달 곳이 없을 정도였으며, 항상 신도들로 북적이던 사찰이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19까지 겹쳐서 거의 법회와 행사도 없고, 신도들도 많지 않고, 관리할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Q. 이리도 코고 유명했던 사찰이니 관리를 잘하고 코로나 19가 끝나면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것도 같은데요.

 

A. . 맞아요.

예전 신도들로 북적이던 혜봉원이 자주 그립습니다.

저도 그렇고 주지 스님도 그렇고 나이도 많고 해서 지금은 관리가 안 되는 것은 사실이고

관리 할 수가 없습니다.

코로나 19로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신도 몇 명만 모여 간단하게 법당에서

법회를 볼 정도입니다.

일단 코로나 19가 빨리 종식이 되어 매주 법당에서 법회도 보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19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고, 주지 스님의 나이도 많아 사찰관리가 어려워서, 혜봉원의 향후 진로와 관리에 대해 가족들과 상의도 하고 많이 고민 중입니다.

 

 

사찰 혜봉원은 왜 원()이라고 했을까요?

 

 

예전에 사찰이 의료나 역참(驛站)의 기능을 담당했다는 것은 역원(驛院)이라는 명칭에

절과 여관을 나타내는 원()자가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는데요.

특히 원()자가 들어간 사찰은 대부분 역참 기능을 담당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첫 번째는 예전 초창기의 혜봉원이 사찰이라고 하지 못할 정도로 작은 사찰이라서

작은 집이라는 의미에서 원자를 붙여 혜봉원이라 했으며, 두 번째는 절의 역참 기능도 있고 익산역이 가까이 있어 주지의 법명 뒤에 원을 붙여 혜봉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원이란 이름을 가진 사찰로는 예전에 유명했던 청주 하늘재의 미륵대원, 안동의 제비원,

파주의 혜음원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모두 폐사되었고 터만 남아있는 사지입니다.

그러니 아마 현존하는 사찰로는 익산의 혜봉원이 유일하게 원이 들어가는 사찰이지 않나?

생각해보았습니다.

 

 

현재의 주지 스님인 초지 스님이 아버지인 해봉 스님의 뒤를 이어 주지가 된 지 36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하는데요.

혜봉 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는 지금의 불이정사와 소법당 사이 잔디밭에 조그맣고 초라한

보잘것없는 작은 법당 하나만 있었고요.

그 법당이 자꾸 앞으로 기울어져 부득이 허물고 지금의 불이정사와 우화루 등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혜봉원 방문 후기

 

 

혜봉원 주지 스님과 사찰관계자와 인터뷰를 했던 필자의 방문 후기입니다.

혜봉원은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고찰입니다.

코로나 19등으로 인해 요즘 혜봉원은 관리도 안 되고 무척 어려운 환경에 있는 듯합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이 3점이나 있는 익산의 도심 사찰로는 오래되고 규모가 큰 사찰

혜봉원입니다.

 

 

익산 혜봉원은 관과 민 모두가 합심해서 잘 관리를 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종교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철인데요.

공공근로라도 자주 보내주어 혜봉원을 예전처럼 아름다운 사찰로 만들고, 신도들이 자주 찾는 사찰, 시민들 역시 즐겨 찾는 아름다운 사찰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