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천도
한양천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청성백 심덕부, 좌복야 김주,
전 정당문학 이염, 중추원학사 이직을 판사로 임명하였다.
이성계가 인왕산에서 돌아온지 보름만이다.
이성계가 천도문제를 서두른 것은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는 개경인들의 시선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권중화, 정도전, 심덕부, 김주, 남은, 이직에게
한양을 현지 답사하여 종묘사직과 궁궐터를 살펴 보고하라고 명했다.
성질이 급한 이성계는 보고서가 올라오기도 전에 정도전을 조용히 불렀다.
“종묘와 궁궐 공사는 임자가 책임지도록 하라.”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전각 이름은 손수 짓도록 하라.”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막중한 임무가 정도전에게 부여됐다.
남경 이궁터에 시작한 공사가 협소하고 볼품이 없었다.
짓던 공사를 쓸어버리고 남쪽으로 부지를 확장했다.
13만여 평에 이르는 광대한 토지다.
1395년 8월 12일. 징발령이 떨어졌다.
전국의 목수와 석공을 소집했다.
경기좌도에서 4500명, 우도에서 5000명, 충청도에서 5500명의 장정을 징발했다.
사상최대의 인력 투입으로 공사에 속도가 붙었다.
종묘가 완성되었다.
착공 1년만이다.
이성계가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신묘에 제향을 올린 다음 연회를 베풀었다.
가무가 있고 음악이 있는 흥겨운 잔치였다. 술이 세 순배 돌았다.
“삼봉!”
이성계가 정도전을 가까이 불렀다.
“네. 전하!”
“새로운 도읍지에 종묘를 짓고 조상에게 제향을 올리니 내 마음 기쁘기 한량없다.
모두가 임자 덕이다.”
“황공하옵니다.”
“새로운 궁궐을 경복궁이라 하였는데 그 연유가 무엇인가?”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얼큰해진 정도전이 시(詩)를 읊었다.
“흥겨운 잔치에 생뚱맞게 웬 시인가?”
“시경(詩經) 주아(周雅)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그럴듯하군.”
“궁궐이란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이요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곳입니다. 전하께서 태평을 이루시고 전하의 자손이 만년 업(業)을 누리시어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길이 보고 느끼게 하라는 뜻으로 두 글자를 따와 경복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좋아요. 좋아!”
이성계의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백성을 중히 여기고 건축을 삼가라.’ 했습니다. 어찌 임금 된 자가 백성들을 힘들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넓은 방에 거처할 때에는 빈궁한 선비를 생각해야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불면 그늘진 곳을 생각하여 만백성을 살피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어깨가 무겁군.”
이성계가 하사주를 내려 주었다.
“황공무지로소입니다.”
“과인이 정사를 살필 곳이 어디인가?”
“근정전과 사정전입니다.”
“각각 쓰임새가 다른가?”
“근정전은 정전이고 사정전은 편전입니다.”
“근정전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
“서경에 이르기를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문왕은 아침부터 날이 기울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을 갖지 못할 정도로 부지런히 정사를 살펴 만백성을 편안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부지런을 모르는 것만 못합니다. 여악(女樂)으로 부지런하고, 사냥으로 부지런하고, 과한 토목(土木)으로 부지런한 것은 그 폐해가 황음무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이라고 했습니다. 하여, ‘어진 이를 구하는데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데 부지런 하라.’는 뜻으로 근정이라 하였습니다.”
정도전의 답변은 거침이 없었다.
한 마디로 왕이 되었다고 황음에 빠지지 말고 백성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라는 주청인 셈이다.
정도전은 나주 회진현에서 유배생활 할 때, 이 나라의 백성들이 관료들에게 착취당하고 핍박받는 것을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이때 정도전은 위정자가 바른 정치를 펼쳐야 백성들이 편안하다는 것을 통감했고 자신이 정치 일선에 나서면 군주는 왕도를 걷고
재상은 백성들에게 봉사하는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깊은 뜻이 있었군.”
이성계가 술을 내려 주었다.
“과음하여 지난번과 같은 실수가 있지나 않을까 저어됩니다.”
정도전이 함주 막사에서의 통음을 상기했다.
“그건 실수도 아닐세. 오늘은 과인이 기쁜 날이니 걱정 말고 어서 마시게.”
이성계가 또 술을 내려 주었다.
“궁궐의 문은 열기도 잘해야 하지만 문단속을 잘해야 하지 않겠나?”
새 왕조를 개창했으니 축성에 신경 써야겠다는 속내다.
“동쪽에는 건춘문, 서쪽에는 영추문, 북쪽에는 신무문, 남쪽 오문(午門)을 광화문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동춘 서추에 남광이라... 정문 이름이 제일 마음에 드는군!”
정도전과 이성계, 임금과 신하, 사나이와 사나이들이 주고받는 술잔 속에 경복궁의 밤은 깊어갔다.
고려의 패망원인을 불교에서 찾은 정도전은 성리학적 입장에서 철저하게 척불숭유정책을 신도에 관철시켰다. 종묘사직과 궁궐을 지은 다음 성곽을 쌓고 4대문을 건립하면서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4대문 이름에 구현했다. 도성 동쪽에 있는 흥인지문의 인(仁), 서쪽에 있는 돈의문의 의(義), 남쪽에 있는 숭례문의 례(禮), 종루가 있는 보신각의 신(信)이 바로 그것이다.
“북쪽에 있는 북대문에 지(智)자를 넣지 않고 왜 숙청문으로 지었는가?”
“애초에는 소지문(炤智門)으로 지었으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슨 이유인가?”
“소신은 술수를 모르오나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 의하면 북(北)은 음양오행에 따라 음기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북대문을 열어두면 외척이 발호하고 아녀자들의 음탕함이 풍속을 어지럽히게 되니 지(智)자를 쓰지 말고 삼수변을 쓰자고 하여 숙청문(肅淸門)으로 하였습니다.”
“천하의 삼봉이 술수를 믿는단 말인가?”
이성계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외척발호는 망국의 원인입니다.”
“암, 그렇고말고...”
“외척발호는 기필코 막아야 합니다.”
이방원이 끼어들었다. 천연 신념일까? 학습된 관념일까? 등극한 이방원은 처가를 요절내고 아들의 처가마저 박살내버렸다. 민무구, 민무질과 심온이 바로 당사자들이다.
“백악 아래 도읍을 정한 왕조는 천년을 이어갈 수 있으나 외척을 다스리지 못하면 반 토막 날 것입니다.”
“반 토막이라 했는가?”
“네 그렇습니다.”
“반 토막이라도 좋네, 5백년만 간다면...자, 이술 한잔 더 받게.”
3대, 5대, 일이백년 가는 왕조도 많은데 500년이라니 이 아니 좋은가. 기분이 한껏 달아오른 이성계가 또 다시 하사주를 내려 주었다.
“황공무지무지소로입니다.”
평생 한 번 받아보기도 어려운 하사주를 연거푸 받아서일까? 주기가 온몸에 퍼져서일까? 혀가 꼬였다. ‘황공무지’가 흔들렸지만 귀신이 따로 없다. 무학대사는 200년을 내다보고 임진왜란을 예언했는데 정도전은 500년 후 민씨의 치맛바람을 예고하고 있지 않은가.
1396년. 9월 15일. 경복궁이 완공되었다. 착공 3년만이다.
이성계가 의장을 갖춰 경복궁으로 옮겼다.
꿈에 그리던 천도다. 새 나라를 세우고 새집을 짓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 하니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더불어 개경인들의 질시의 눈초리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기쁨에 겨운 이성계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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