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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싸움에도 정도가 있다

와이투케이 2011. 6. 16. 19:13

          

결혼 26년 차, 큰 소리 내어 싸워 본 게 몇 손가락 안에 든다.

이렇게 말하면 남편이 군자인가? 하는 사람 있겠다. 혹은 아내가 신사임당

후예인가 할지도 모르고.

둘 다 틀렸다. 우린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고 오히려 싸울 만한 꺼리가 남보다 많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처럼 싸우지 않고 살았냐고?

우린 싸우지 않은 게 아니라 소리 없는 전쟁을 주로 했다. 남편이 화가 나면 나는 일단 입을 닫았다. 남편은 혼자 성질 부리다가 그친다. 메아리가 없으니 더 이상 진전이 안 되는 것이다. 늘 그런 식이었으니 내 목소리가 집밖으로 나갈 일이 없고 남들이 보면 싸우지 않고 사는 줄 안다.

 

애들 앞에서 소리 내어 싸운 적도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 딸들은 안다.

촉수가 잘 발달된 더듬이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아, 엄마 아빠가 싸웠구나.

길거리에서 남편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여자들을 보면 그 집 남편을 해부해 보고 싶어진다.

사람들 앞에서 남편을 면박주거나 할 말 따박따박하는 여자들을 보면 내 가슴이 오그라 붙는다.

저러고도 무사할까? 왜냐면 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참 어진 아내구나, 하며 부러워하는 남편님들 있겠지?

어질어서가 아니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고 우리 집 남편은 그런 게 절대로 용납 안 될 사람인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을 뿐이다.

 

남편은 참으로 보수적이고 봉건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군인 장교이거나 예비군 중대장, 혹은 이런 저런 장 자리에 계셨던 때가 대부분이어서 사람을

호령하는 데에 익숙하시다. 아내라고 하여 다르지 않았다. 우리 시아버님 앞에서는 모두가 부하였다.

어머니는 전통적인 아내상이시다. 신사임당 후예가 있다면 아마도 우리 어머니가 아닐까 싶다.

원래 음성이 작고 입이 우물처럼 무거우시다. 자식들에게도 큰소리를 치지 않는 분이시니 남편에게는

오죽했겠는가.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다. 남편은 늘 큰소리를 쳐도 되고 가족을 부하처럼 대해도 되며

아내는 무조건 남편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게 뼛속까지 박힌. 

그러니 남편을 고쳐 놓겠다고 덤비다 보면 둘 다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테고 가정은 오래 전에 풍비박산이

났을것 같다

 

26년이란 세월을 건너오는 동안 출렁일 때, 참  많았다.

하지만 이만큼 가정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나만의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특허라도 내야 할 비법인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 남편이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고 (남편은 자신이 180도 달라졌다고 한다.)

아내가 자기 인생의 멘토였다고 남들 앞에서 고백할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남편이 미울 때, 혹은 남편이 내게 주었던 상처보다 백 배로 불려 돌려주고 싶을 때, 부부싸움 끝에,

내가 확실하게 지켰던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남편이 화가 나거나 큰소리를 내면 일단 입을 닫았다.

 

부부싸움은 주로 말로서 시작된다. 곱지 않은 말들을 주고 받다 보니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화가 솟을수록 말은 거칠어지고 행동도 과격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한쪽에서 입을 닫으면 싸움이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나는 이미 상처를 입었지만 남편까지 상처를 입으면 길이 없어진다.

내가 반격하는 말이 거칠다면 남편 역시 상처를 입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남편은 자신이 내게 준 상처를 기억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상처만 기억하게 된다.

그게 사람의 속알딱지다. 

내가 먼저 상처를 주었으니 아내가 그렇게 나온 것이라며 넓게 생각해주는 남편이 얼마나 있겠는가.  

또 끝까지 가고 싶어도 체력이 열세라.... 체력을 길러야지, 수없이 다짐했지만 아직까지 이 모양 이꼴로

빌빌거리니 끝까지 싸움을 끌어갈 수도 없었다.(이건 농담 같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부부싸움이 육체적인

                                                                   폭력으로까지 확산이 된다면 아무래도 여자쪽이 불리하니까.)

 

늘 아내가 참고 살라는 말은 아니다.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고 말지, 하는 사람들 있겠다.

맞다. 차라리 죽고 싶어질 것이다. 싸움의 끝은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시도해야

하고 상대방의 상처를 쓰다듬어줘야 한다. 우리 집은 늘 남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큰 소리 내고 5분도 

안 걸린다. 혼자 큰 소리내고 일방적으로 상처를 냈으니 항상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러면 난 그때를 잡아 

조근조근 하고 싶은 말들을 한다. 남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그러면 안 되는지....

 

 

아무리 미워도 밥을 굶기지는 않았다.

 

금방 화해가 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들도 있다. 마음을 굳게 닫은 체 다음 날을 맞기도 한다.

마음 같아서는 확 도망가 버리고 싶다. 나 없는 세상이 어떤지 쓴 맛 좀 보게 하고 싶다. 그런데 참고 있

으려니 분통이 터진다. 그런 남편에게 밥상을 차려 줘? 그래도 차려 줬다. 서로 잘 지낼 때처럼 정성껏.

그러면 남편은 밥을 먹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뭐가 이쁘다고 이렇게 밥상을 차려 줘?"

 

 

시집의 약점을 끌어 오거나 남편의 취약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았다.

 

시집 형제들 때문에 힘들 때 많았다. 하지만 한 번도 그걸로 남편을 불편하게 한 적이 없다.

그건 그들의 잘못이지 남편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린 우리 만의 문제로도 싸울 거리가 충분한데 시집의

약점까지 끌어들여 남편의 마음을 헤집고 싶지는 않았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제 많은 집안이라 흠 잡으려고 들면 왜 없겠는가. 그런데도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처가 식구들 흉을 본 적이 없다. 

 

부부싸움의 목적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그러나 싸우다 보면 본디의 목적은 온 데 간 데 없고 

오직 남편을, 아내를 해치기 위해 혈안이 될 때가 있다. 연애 때의 설렘이 없더라도 남은 생, 함께 가야 할 사람

이라면 조금만 더 상대방을 받아 들여 주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주면 좋지 않을까.

측은지심도 좋겠다. 날마다 전전긍긍하며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남편이 참 가엾다, 나 보다 더

괜찮은 사람 만났으면 호강하며 살았을 텐데, 우리 아내도 참 가엾다 하며 말이다.    

 

 

                                            (굄돌님 펌글)